보도자료실

  • home
  • 연구소활동
  • 보도자료실
게시물 목록
제목 보도사 보도일자 조회수
6세기로 가는 신라의 門 빗장 풀렸다-양평 대평리 신라 고분 2기 발굴 경기일보 2014.11.14 3283

 

6세기로 가는 신라의 門 빗장 풀렸다

양평 대평리 신라 고분 2기 발굴
1천400여년전 ‘양평’은 신라의 변방이 아니었다

 

 

 ▲ 대평리 고분군 전경. 
▲ 대평리 고분군 전경.

 

무덤의 주인은 성골? 진골?… ‘중부지역 최대 규모 고분’ 신라 왕족·호족 가능성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일원에서 신라 고분 2기가 발굴되면서, 그동안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돼왔던 신라 왕족이나 지방호 등 고위층의 고분이 양평에서도 확인됐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신라 고분 2기는 그동안 충북 충주 누암리나 경기 여주 매룡리, 용인 보정리 등지에서 발굴된 고분들에 비해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학계가 긴장하고 있다.

종전까지는 지난 2008년 충주 누암리에서 발굴된 고분군(사적 463호)이 최대 규모였다.

누암리 고분군은 7개 구역에 걸쳐 중ㆍ대형 석실분을 포함, 모두 230여기에 이르는 고분들이 발굴됐었다.

그러나 도굴 등으로 인해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고고학계가 신라 후반기 6세기 전후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평리 신라 고분은 이미 지난 1980년대 후반 향토사학자들이 대평리 일대에 신라 고분들이 3곳에 위치했다는 뜻의 ‘삼태능(三泰陵)’을 제기한 뒤, 지난 1999년 LH(당시 한국토지공사) 산하 토지박물관이 간행한 학술조사총서인 ‘양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통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항들과 거의 동일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술됐었다.

향토 사학자들은 신라 고분 2기 이외에 현재 골프장이 조성된 곳에 또 다른 1기가 있었다고 보고 있는 가운데, 골프장 쪽 고분은 골프장 건설로 멸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 대평리 고분군 1호분. 
▲ 대평리 고분군 1호분.

대평리 신라 고분 규모는 북쪽에 위치한 1호분의 경우, 능선 상부에 위치하고 봉토의 규모는 지름 12.1m(외호석 지름 18.3m), 높이 4.2m로, 봉토북쪽 상부에는 도굴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갱이 뚫려 있지만 석실의 구조는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다.

석실은 평면 방형(길이 2.6m, 너비 2.5m, 높이 2.7m)이고, 연도는 좌편재(左偏在:왼쪽으로 쏠려 있음)이고 천장은 궁륭형(조임식 방식)이다.

호석은 2중으로 확인되는데, 내호석은 경사를 이용, 지대가 높은 곳은 1~2단, 낮은 곳은 최대 7단(높이 1.65m)까지 쌓아 올려 성벽과 같은 석축형태를 보인다.
 

 ▲ 12일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야산에서 중부고고학연구소 관계자들이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 12일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야산에서 중부고고학연구소 관계자들이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외호석은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전체를 둘렀다. 석실은 내부에는 북쪽과 동쪽에 65㎝ 높이의 시상대를 설치했다. 연도 전면의 묘도(墓道:무덤길) 폐쇄부는 남쪽 호석의 석축까지 이용했으며, 묘도의 동벽은 연도와 나란하게 이어지지만, 서벽은 서쪽으로 꺾인 게 특징이다.

2호분은 능선 하단에 위치하며 봉토의 규모와 도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간략하게 조사한 결과, 봉토 정상부 북쪽에서 도굴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갱이 확인됐다.

봉토의 규모는 지름 19.3m(외호석 지름 26.5m), 높이 4.7m 정도이다. 도굴 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석실은 1호분보다 규모가 크며, 평면 방형으로 천장은 궁륭형이고 연도는 중앙에 위치한다.

석실 벽에는 회를 발랐으며, 서벽을 따라 시상대가 설치된 점이 확인됐다. 호석은 일부에서만 확인됐지만, 1호분과 동일한 2중 구조로 판단된다.
 

 ▲ 1호분 연도. 
▲ 1호분 연도.

 

이번 발굴작업을 진행했던 김권중 중부고고학연구소장은 “유물들은 도굴로 인해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분의 축조방법과 석실의 구조 등으로 볼 때 6세기 중·후엽에 축조된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며 “고분의 주인공은 이지역 일대를 통치하던 지방 호족의 수장이나 중앙 정부 즉, 경주에서 파견된 최고위급 지방관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발굴 조사는 1호분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진행됐고, 2호분에 대해선 추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양평=허행윤기자
사진=전형민기자∙문화재청 제공

 

  
 

[인터뷰] 김권중 중부고고학연구소장

 
소중한 유물 싹쓸이 도굴문화 조명 한계 안타까워

“2개월여 동안 1천400여년 전의 역사를 재현한다는 각오로 발굴에 임했는데, 오래전에 도굴돼 당시 유물들이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번 조사를 지휘한 김권중 (재)중부고고학연구소장(45)은 대평리 현장에서 100여명의 직원들과 동고동락한 감회를 이같이 밝혔다. 그는 “(도굴되지 않았다면) 통상적으로 당시사용됐던 다수의 토기들을 비롯해 금속제품으로 고위층을 입증할 수 있는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장식, 관모(冠帽), 칼 등이 출토된다”며 아쉬워했다.

이번 발굴과정을 통해 출토된 유물은 토기의 손잡이인 우각형 파수(쇠뿔 손잡이) 1점이 유일하다.김 소장은 경주에서 발굴된 고분들이 대부분 드넓은 평야에 위치한 점과 관련, “평야에 고분을 조성하던 문화는 대부분 5세기 이전에 국한되고, 5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대평리 신라 고분처럼, 야트막한 언덕 등에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도굴된 점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발굴과정에서 연도나 석실 입구 등지에서 돌들이대체로 가지런하게 쌓여 있는 점”이라며 “쇠뿔손잡이도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일부 조각이 발굴된 점은 도굴 후 밖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져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 고분이 고위층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는 철저한 계급사회인데다, 고분 안팎에서 발견된 수백개에 이르는 돌들을 외지에서 옮겨 오고, 봉분을 만들고, 석실을 조성하려면 100여명 이상의 인력이 조성에 참가해야 가능한데 고위층이 아니면 이같은 인력을 동원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20여년째 문화재 발굴작업에 임하고 있다.

양평=허행윤기자

< 저작권자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목록
이전글
양평 대평리 고분, 신라 상류층 묻힌 돌방무덤으로 확인
다음글
6~7세기 한반도 중부지역 신라수장층 무덤 발굴